**가 깊어, 남자 많았어? 라고 하는 건 무슨 심보야.
몇 명이랑 해봤냐고 묻는 거나, 뭐가 달라.
너 없을 때, 아무도 없었는데.
나보고 남자 좀 만나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래.
왜 꼭 그런 말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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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ris를 떠나는 마지막 밤 열차 1.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추웠다. 손이 오그라들고, 마음이 오그라들고, 배도 고팠다.
난 여기에 왜 왔을까.
내 머리 위로 한참이나 멀리 있는 기차역의 유리 돔 위로 짙은 어둠이 내려있었다. 드골 공항에 도착할 때만해도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라며 혼자 좋아했던 나는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를 보고 질려버렸다.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간, Paris의 어두운 밤은 낯설고 차가웠다. 1월 답게 프랑스 땅의 모든 공기는 차가웠고, 더더욱 얼음장 같은 기차역 안의 공기는 프랑스어 벙어리인 내 입안을 꽁꽁 얼려놓고야 말았다. 저 멀리 유리 돔 위에 얹혀 있는 어두움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기차역 안의 모든 매장이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나는 깜깜한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하필 왜 대한항공을 끊었던가. 저녁 비행기로 떨어지는 일 같은 것은 무리수였다.
“Pardon. (실례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빠르동 (실례한다)’이라고 재빨리 뱉으며 내 짐들을 걷어차고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제 갈 길 가고 있는 파리지앵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큰 방해요, 장애물이었다. 막차시간이 다 되가는 기차역 한 복판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동양인 여자, 덤으로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빨간 여행 캐리어를 이고 있는 여자. 오며 가며 발로 차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이 세트는 이 바쁜 기차역 한 복판의 커다란 장애물이 아닐 수는 없었다.
“아아아아아, 도대체 어디냐구.”
아까 TGV(프랑스 철도) 카운터의 무뚝뚝한 그 여자는 나한테 ‘손가락 5개’를 모두 펴 보이며 가라고 했다. 신경질적으로 다음 사람을 크게 불렀다. 너 너무 귀찮으니까 빨리 가라는 표정. 알아는 들었지만 무슨 소리를 해야 욕이 될지 아는 바가 없어서 안타깝게도 욕 해줄 수가 없었다. 평소의 나 였어봐, 니가 나한테 눈물 쏙 빼며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분풀이 해 줄 수 있는데 말이지. 운 좋은 줄 알아, 뚱보 아줌마. 하릴없이 씩씩거리며 돌아선 나는 다시 한 없이 작아진 채, 그렇게 수많은 플랫폼들을 사이에 두고 비석처럼 서버렸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밤 열차.
그것이 내가 오늘 타야하는 열차이다. 그 열차를 놓치는 순간, 나는 이 망할 놈의 기차역에서 노숙해야 한다. 난 밤 열차 안에서 주무실 계획만 세웠지, 호텔이며 민박이며 알아본 게 없으니까. 무조건 그 여자 말대로 손가락 5개가 가리키는 곳, 그러니까 그 놈의 5번 플랫폼으로 가야했다. 그 여자가 가라고 한 그 곳이 오늘 밤, 자정 전, 내가 당도해야 하는 곳이었다.
“으으으으으으으으.”
5번 출구에만 가면 누워 자도 될 거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 놈의 기차는 스페인으로, 그러니까 나의 행선지 마드리드로 가는 열차가 아니었다. 내 차표를 받아든 아랍계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로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했다. 아니라는 것 같은 분위기, 알아 듣기 싫었지만 알 수 밖에 없는 그 제스처.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비장의 무기, 손가락을 모두 폈다. 알제리가 고향일 것 같은 남자는 미간을 찌부리며 고개를 또 저었다. 난 미친사람처럼 열심히 손가락을 모조리 펴들고 흔들었다.
“Five?”
“Quoi?(뭐?)”
“야!! Where do I have to go? (어디로 가라고?)”
나는 그야말로 사방 군데로 삿대질을 해가며 발광을 해댔다. 시계는 11시. 내 차는 11시 반 출발. 나는 발광이라도 해야 했다. 경찰 오라고 해. 배운 놈은 영어를 하겠지. 오라질 프렌치들, 만국 공통의 언어, 영어 몰라? 나는 몽둥이를 구해오고 싶을 지경이었다.
“What's wrong? (무슨 일이에요?)”
“Uh? (네?)”
발광을 해대는 내 뒤로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건넸다.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순식간에 돌아섰다. 김연아 선수가 잘 하던 무슨 악셀 턴을 하는 양 뛰어오르듯 돌아선 나를 보고 그는 적잖이 겁을 먹어 보였다.
“Where are you from? (어디서 왔죠?)”
“What? (뭐?) I need to go to spain right now. (나 당장 스페인 가야 되거든.) Wherever I'm from. (어디서 오든 무슨 상관?)”
“You need to go to spain tonight? (오늘 밤 스페인으로 간다고요?) One transfer? (한번 갈아타고요?)”
그랬던가? 아까 티켓을 끊을 때 뭐가 있었던 것 같긴 했다. 나는 티켓을 다시 살펴보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놈이 엉겨 붙었다.
“Let me see. (한번 봐요.)”
“No.(싫어.)”
도둑이면? 내가 너님을 어떻게 믿고 20만 원짜리 이 티켓을 보여준단 말인가?
나는 이를 앙다문 듯 대단히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아니된다’고 했다. 남자는 어이없어했다.
“I am going to spain tonight, but as you want to…….(제가 오늘 스페인 가서 그런 건데, 그래도 뭐 원하시는대로.)”
“Where? Where? Platform number? (어디요? 어디요? 플랫폼 어디?)”
그 때는 그 남자도 스페인 가는 기차를 탄다는 소리라고는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Spain tonight'이라는 단어가 거짓말처럼 귀에 꽂혔다. 나는 길길이 뛰었다. 어디냐고 다그쳤다. 잠시 뒤로 주춤거리던 남자는 손을 까딱거렸다. 티켓을 달라는 눈치구나.
그래. 너 놈이 이걸 쥐고 뛰면 난 너 등 뒤에 엎혀서라도 널 물어 죽여버리면 되지.
이걸 먹고 튀게는 안 할 것이야. 난 마음을 다잡았다. 난 13시간이나 비행기를 탄 여자답지 않게 눈알에 힘을 주며 천천히 티켓을 건네주었다. 남자는 묘한 웃음을 머금고 내게 티켓의 오른쪽 귀퉁이를 가리켰다.
“Platform 8. (8번 플랫폼이요.)”
세상에.
티켓에 써있었구나. 나의 개무식이 글로벌리 오픈되는 순간이 온 것인가.
나는 그 차가운 기차역 한 가운데에서 붉게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붉고 자시고 달아오를 때가 아니었다. 20분도 안 남았을 티켓팅 시간을 위해 8번으로 달려가야 한다. 청년, 자네 고마웠지만, 우리 다음 생에서 만나 차라도 한잔 하세나. 나는 최대한 여유 있는 미소를 띄우며 그의 손에서 내 비싼 티켓을 낚아챘다.
“Merci, merci. (고마워요, 고마워요)”
나는 티켓을 말아쥐며 뛰어갈 준비를 마쳤다. 그때 얼핏 그 청년은 나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지만, 아는척 해 줄 수 없었다. 너 아쉬운 거 안다. 너 이렇게 여독에 찌들어 뒷머리 팍 눌린 내 모습조차 마음에 드나 본데, ‘쯧쯧‘이란다. 여자의 잠재적 아름다움을 다 파악해낼 정도라니 너도 꽤나 외로웠나보지만, 난 갈길이 바빠서 이만 가야하니까. 내가 저 기차를 타고 꿈나라로 가거든, 그 때는 너를 한 번 기억해줄게.
“Merci!!!! (고마워요.)”
나는 뒤뚱거리며 뛰어가는 동안 그래도 인사치레삼아 한 번은 뒤를 돌아보며 웃어주었다. 고맙다는 인사하는 데야 뭐, 돈 드는 거 아니니까 말이지. 그렇게 차갑던 역 안의 공기는 내 얼굴이 다 데웠는지, 옮기는 발걸음 마다 더운 김이 서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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